본문 바로가기

측정 인사이드/생활과 측정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알차게 맺힌 결실

 

 

 <측정표준이 과학기술 및 산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사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전시상황에서는 다르다. 시간에 맞춰 전쟁물자를 생산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측정표준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M-diary 코너에서는 세계 2차대전 당시 전시 상황에서 호주의 측정표준이 어떻게 체계를 잡아나갔는지의 과정을 소개한다.> 

 

호주의 측정 표준이 체계를 잡아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 때였다. 호주 연방정부는 각 주의 주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CSIR(산업과학연구위원회, Council for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 산하의 중앙 집중화된 국가표준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주마다 주 정부의 통제 아래에 놓인 단일화된 측정 표준과 테스트 연구소를 설립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방정부 총리의 편지를 받은 호주 주정부들은 각각 다르게 움직였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는 정부의 재정 지원이 원활하지 않은 속에서도 목표를 향해 상당히 잘 진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뉴사우스웨일즈, 빅토리아, 퀸즈랜드를 비롯한 다른 주정부는 연방정부의 재촉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영연방 소속국가로서 호주 또한 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전시에 주 정부들은 표준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였다. 결국 전쟁은 호주의 측정 체계 형성 과정에 있어 종전 이후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전시긴급모델


1938년 MSL(측정표준연구소, Measurement Standards Laboratory)는 80명의 인원으로 모든 업무를 간신히 운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을 무렵 국방부 산하 공장들은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각 주의 민간 기업의 공장이 투입됐다. 각 공장의 생산품은 테스트를 위해 MSL로 보내졌고 당시 MSL에는 240명의 연구원이 있었지만 넘쳐나는 업무로 고충을 겪었다. 이 시기가 측정모델이 제 역할을 해주어야 할 때였지만, 당시 호주는 이를 수행할만한 측정 인프라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한 첫 해에는 모든 청동 샘플의 화학 분석, 철강 장력테스트, 게이지 체크는 매리비농 지역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NSL(국립표준연구소, National Standards Laboratory)은 업무 협조 요청을 받았다.

 

1940년 초 NSL의 첫 번째 건물이 거의 완공될 무렵, CSIR(산업과학연구위원회, Council for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은 자동차 제조업체 GMH를 도와 집시 모스(Gypsy Moth) 엔진을 생산하라는 긴급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국방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부품 생산은 시드니와 멜버른, 애들레이드에 있는 제조업체에 하청을 보냈는데, 당시 하청업체와 맺은 계약서에는 생산 부품이 호주와 영국 두 나라에서 제조된 유사한 부품들과 호환 가능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1940년 1월 CSIR에게 첫 번째 요청이 들어왔다. 군수물자공급부서는 CSIR에게 하청업체가 제조한 게이지를 체크할 수 있는 시설을 시드니 내에서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줄리어스 SAA(호주표준협회, Standards Association of Australia) 회장은 헤블화이트 SAA CEO의 도움을 받아 시드니대학에서 게이지 체크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줬다. GMH가 자체적으로 많은 게이지 검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계획을 빨리 바꾸긴 했지만, CSIR에 들어가는 요청은 여전히 계속됐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집시 모스 엔진에 사용될 나삿니 길이의 기준이었다. 이 나삿니는 미터법에 의거해 제조됐기 때문에 미터법 기준이 필요했다. 매드슨과 에서만이 영국에서 적당한 치수가 있는지 찾아봤지만, 결국 NPL(국가승인연구소, National Proving Laboratory)이 그 기준을 제공했다. 이후 호주가 정밀용접선반과 나사연삭기에 사용할 납 나사를 생산할 때도 이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또한 GMH는 자재 테스트에 관여하고 싶어 했다. 영국항공부처 지침에는 다양한 사양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호주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를 대체할만한 적절한 검사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채 영국 사양을 채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당시 GMH의 2인자였던 존 스토리는 1월, 줄리어스에게 이 점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 일은 CSIR만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줄리어스는 테스트 방법을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고 적절한 테스트 관련 교육이 이뤄지기만 한다면, CSIR이 테스트에 참여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존 스토리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소규모의 수많은 기술 관련 기업들이 동일한 기준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며, 이 일은 시급한 사안이라고 리벳에게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그 기업들이 독자적으로 검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했다. 호주의 주 정부들은 국가가 나서기 전에는 움직이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CSIR이 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 MSL 업무는 이미 과부하였으므로 줄리어스는 최소한 각 주 정부가 테스트 센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전까지라도 CSIR가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이 일을 담당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0년 2월 줄리어스는 위원회를 구성하고 1938년에 자신이 제시했던 계획을 되살려, NSL 내에서 조정을 담당할 네 번째 부서 설립을 진행했다. NSL 위원회는 같은 해 3월 각 주의 산업, 대학, 정부에 흩어져있는 테스트 기기 사용의 조정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하고, 이로써 진행이 지지부진한 각 주의 테스트 시설 설립을 우회해나갈 수 있는 계획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테스트 기기 대부분의 캘리브레이션이 부정확해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했고, 테스트 기기를 사용하는 기술자들도 미숙했다. 실제로 신뢰할만한 테스트 결과를 얻기 힘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업이 다른 연구소에서 측정을 수행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사 연구소의 측정 결과도 부정확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새로이 설립된 NSL 부서는 사용 가능한 테스트 기기를 진단하고 캘리브레이션을 진행했다. 또한 측정 연구진의 자격을 평가하고 SAA(호주표준협회, Standards Association of Australia)와 협력해 표준 테스트 방법을 정하고, 공인된 연구소로부터 테스트 결과에 대한 국가적 승인을 확보하고 측정을 수행하는 데 있어 호주에서 사용되는 소재와 조건에 맞는 세부 요건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NSL은 산업, 정부, 민간 기업 전문가들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누가 이 NSL의 새 부처를 이끌 것인가? NSL 위원회는 꼼꼼하고도 까다롭게 업무를 수행할만한 리더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당시 SITRC를 이끌고 있던 헤블화이트가 적임자였으나 그는 SAA의 CEO로서도 상당히 바쁜 상황이었다. 그러나 SAA 또한 군수품 소재와 항공 엔진의 사양을 준비하도록 이미 요청받은 상황이기 때문에, SAA 회장으로서 줄리어스는 1년 정도라도 헤블화이트를 NSL에 파견근무를 보내 관련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자고 SAA를 설득했다. 헤블화이트 외에 적임자는 없었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헤블화이트는 SAA에서의 다년간 근무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며 상당한 경험을 쌓은 인재였다. 헤블화이트는 차분하고도 위엄 있는 성격에 산업계 운영자들과의 폭넓은 유대관계는 물론 업계 리더들과의 탁월한 인간관계도 갖춘 사람이었다. 헤블화이트 덕분에 산업과 SAA, NSL 간에 필수적인 직접적 연관 관계가 형성됐고 유지됐다.

 

처음부터 줄리어스는 새로 설립된 NSL 부처가 호주 국가 시스템의 정상에서 전국의 비군수품 연구소를 평가·조정하고, MSL은 군수품 테스트를 맡도록 계획한 것 같다. 호주공군항공검사를 책임지고 있던 캡틴 해리슨 그룹은 비군수품 생산 공장을 동원하기 위해 전국에 산재한 테스트 시설 통합을 추진한 기구 중 하나다. 줄리어스의 목표는 테스트 업무를 MSL에서 분권화하고 자신의 ‘일자리 곁’에 테스트 시설을 두는 이득을 누리려는 것이었다. 줄리어스는 헤블화이트 리더십 하에 젊은 대학 졸업생 몇몇으로 꾸린 소규모 팀으로 운영되는 NSL의 새 부처가 캘리브레이션과 평가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문제들이 곧 현실로 드러나면서 혼란이 야기됐다. 1940년 5월 해리슨 공군 준장은 MSL의 힘든 상황이 나아지지 않은데다 NSL이 뉴사우스웨일즈 주에 항공기 소재 테스트를 위한 시설도 아직 마련해두지 않은 것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브로드립은 업무에 적합한 기계와 장비 조작자를 갖추지 못한 헤블화이트와 젊은이들은 특별 측정 훈련을 받지 못한 것 같다고 불평하면서도 에서만의 의견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매드슨도 헤블화이트 팀의 참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SAA가 테스트에 손댈 것이 아니라 주력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벳 또한 헤블화이트가 이끄는 NSL 부처가 대체 어떻게 운영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일단 에서만에게 책임을 맡기자는 브로드립의 주장이 회의적이긴 하지만 수용하려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이에 대한 내 의견은 표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줄리어스는 책임을 전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매드슨과 에서만, 워크, 헤블화이트에게 테스트 절차를 마련하고 임원진에게 할 일을 알려주라고 지시했다. 매드슨은 갑자기 자신이 이러한 책임을 맡게 된 것에 놀랐지만 해결책을 내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다. CSIR에 신설된 산업화학부의 책임자였던 워크와 함께, 매드슨은 ‘인력을 좀 옥죄면’ 여러 정부 실험실에서 화학물질 테스트를 담당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금속분야의 ‘지극히 허약한’ 부분은 시드니대학의 금속 관련 시설을 활용해서 충족시켰다. 캘리브레이션 작업에 대해서는 NSL의 세 부서장과의 협의한 결과, NSL 특별부서에서 실행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모든 테스트를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1940년 6월 라이트풋이 장관 승인을 확정 받았을 때, 그가 헤블화이트에게 말한 것은 단 2가지였다. 매드슨과 NSL 세 부서와 긴밀히 연락할 것과 에서만에게 NSL의 행정을 맡길 것이었다.

 

총체적 난관은 계속됐다. 불협화음을 지켜보던 리벳은 ‘테스트 부서’에 깊게 관여했든 일부 관여했든, 관계된 다양한 사람들을 살펴보다가 이들 의견에 공통점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헤블화이트의 역할이 모호하다는 점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대로 추진해도 괜찮을지 결정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한편 헤블화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할의 범위와 한계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원칙적으로 그는 산업 전반의 필요와 방위 산업에서 발생되는 요구를 아우르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자원이 제한된 전쟁 상황에서 그는 방위 산업의 요구에 집중했지만, 모든 수준의 테스트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다뤄할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던 실험실들이 대체로 3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먼저, 감독 당국이 테스트 결과를 감독하고 승인을 받고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실험실에서 확인 테스트를 거치는 제조업체의 실험실. 그리고 다른 업체의 생산품을 테스트하는 독립 실험실. 마지막으로 특별히 높은 수준의 테스트와 정확도를 요하는 실험을 하는 특별 독립 실험실. 헤블화이트는 자신이 지휘하는 NSL 부서가 실험실을 가려내고 진단하는 첫 단계부터 마지막 승인, 감독 단계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캘리브레이션은 NSL의 세 특별 부서에 맡기겠지만, 이 또한 자신의 지휘 감독 하에 둘 계획을 세웠다.

 

1940년 중반 군수품 생산 확장과 더불어 헤블화이트의 새로운 임무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즉각적으로 항공기 소재로 눈을 돌을 돌려 관련 사양과 목록, 필요한 테스트를 요청했다. 다음으로는 멜버른에서 국방부 관리를 만났다. 또한, 빅토리아 주의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한 빅토리아 주정부 분석가를 MSL과 함께 만나 세부사항에 대해 논의했다. 해리슨과 브로드립은 멜버른에서 국방부 관리와 가진 회의에서 NSL의 테스트 절차를 승인했다. 그 이후, 헤블화이트, 에서만, 워크는 7월 9일 맥코믹이나 그의 대변인을 만나고자 MSL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들은 뜻하지 않게 ‘테스트 기관 승인 계획’ 운영 방안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MSL 직원으로부터 MSL은 테스트 시설을 정리·조직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으며, 이미 시드니 지역에서 화학·금속 테스트가 가능한 실험실을 살펴봤으며, 굳이 다른 단체의 도움이 필요한 분야는 기계 테스트인데 이 부분은 NSL이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MSL 사람들은 화학, 금속, 측정 진단 그 어느 것도 CSIR에 넘겨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계속된 회의에서는 테스트가 가능한 호주 전역의 민간 시설에 대한 조사를 권장하는 결정이 이어졌고, 결국 NSL이 기계 테스트를, CSIR의 산림자원부가 목재 테스트를 MSL이 화학·금속 분석을 각각 담당하기로 결정됐다.

 

이 결정에 따라 NSL의 역할은 전체 군수품 테스트에서 기계 군수품 테스트로 갑자기 축소됐다. 해리슨은 비록 회의의 결정 사항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헤블화이트가 뉴사우스웨일즈, 퀸즈랜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계약이 아직 만료되지 않은 지역에서 계속 일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혼돈 속에 빠져 정리되지 않았다. 헤블화이트는 MSL가 확인을 마쳤다는 기계 테스트 실험실이 어떤 곳이냐고 문의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고, MSL은 NSL에 검사를 맡기겠다는 구두 요청이 들어오면 확인하고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심지어 에블레이에 위치한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철도청 실험실의 승인도 NSL의 보고서를 기다리지 않고 항공감독관이 진행해버렸다.   

 

헤블화이트의 조사 결과, 호주 전역에는 120개의 기계 테스트 실험실이 있음이 드러났다. 그는 1940년 10월 말 경, 빅토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뉴캐슬, 포트켐블러 지역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실험실들을 방문하고 총 86건의 사전 보고서를 에서만에게 보냈다. 그러나 헤블화이트의 임무는 점점 축소됐다. 기계 테스트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그의 입지는 좁아졌고, 기계 테스트 시설 조사와 평가를 진행할 담당 지역도 시드니, 브리스번, 애들레이드로 제한됐다. 애초에 줄리어스가 고안했던 계획은 헤블화이트가 호주 전역의 모든 검사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헤블화이트가 할 일이 없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떨어져나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자, 줄리어스는 헤블화이트를 놓아주고 에서만에게 테스트 시설 조정 역할을 넘길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에서만이 담당한 부서에 부과된 과중한 업무에 대해 우려가 제기되자 NSL은 뉴사우스웨일즈와 퀸즈랜드의 기계 테스트만 남겨두고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지역에서 손을 떼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리벳은 ‘정말 진정으로 아쉽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줄리어스의 초기 계획에 심각하게 문제점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사실 몇 가지 설명이 가능했다. 그중 하나는, MSL과 NSL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업무 영역 문제에 관한 것이다. 줄리어스는 MSL의 도움을 너무나 바란 나머지 MSL과 손을 덥석 잡았고 덕분에 호주 전역을 아우르는 계획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이는 결국 MSL의 산업 분야를 침범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MSL 또한 주도권을 주장하며 테스트 시설 조정 역할을 할 사람을 내세웠고, 이로 인해 조정자가 2명이 되면서 혼란이 야기됐다. 검사시설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무질서는  MSL의 전문센터 한 곳에 집중됐던 테스트가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실험실에서 행해지는 분권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NSL 또한 건물도 다 지어지지도 않은데다, 연구원들은 영국에서 막 귀국한 초기 단계를 겪고 있었다.

 

NSL의 테스트 시설 조정이 실패한 또 다른 이유는 CSIR과 일부 주요 인물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줄리어스와 헤블화이트는 실제적으로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전문 엔지니어로서 공업에 대한 유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헤블화이트가 받은 전반적 훈련과 경험으로 충분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러한 생각은 ‘타당하지 않았음’이 곧 ‘아주 분명하게’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줄리어스는 매드슨과 에서만이 제의한 테스트 시설 사용계획이 실제로 어떻게 운용되는 것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리벳은 CSIR 고유의 영역에 벗어난 분야에 관여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지만, 매드슨은 테스트 시설 조정 역할은 SAA에 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헤블화이트 또한 외부 실험실에서 ‘독립적’으로 이뤄진 테스트를 NSL이 감독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에서만을 상대해야 했다. 이러한 의견 불일치는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었다. 연방 정부가 보증하는 테스트인증시스템이 절실히 필요하긴 하지만 ‘사안에 대한 상당한 의견 조율과 조정 없이는 NSL이 그 역할을 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헤블화이트는 NSL 역할의 한계점에 대해 근본적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전시라는 긴급한 환경 속에서 난국을 해결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MSL-NSL, 연방정부-주정부, CSIR 내부 갈등까지, 이 세 가지 긴장 관계는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전시에 필요한 긴급 솔루션을 내놓는데 방해가 됐다. 그래서 MSL은 민간 테스트 시스템 중에서 가장 핵심을 취해 ‘테스트 기관 승인 계획’을 세웠고 한창 운영이 이뤄질 때는 160개에 이르는 실험실을 승인하기도 했다. 줄리어스가 헤블화이트를 조정 담당 책임자로 앉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 자리는 MSL의 선임 화학자 E.A. 구드에게 돌아갔다. ‘테스트 기관 승인 계획’이 진행되면서 테스트 분야는 점점 확장되었다. 주물 방사선투과 테스트를 비롯한 고온계 캘리브레이션, 페인트나 부식방지제 같은 제품 테스트까지, MSL은 모든 테스트를 관장했다. 그러나 NSL의 역할 범위는 여전히 뉴사우스웨일즈와 퀸즈랜드의 기계 테스트에만 머물렀다. NSL은 MSL이 주관하고 관리하는 시스템 내의 소규모 파트너 정도의 역할만 담당하게 된 것이다.

 

한편 헤블화이트의 역할이 줄어드는 동안에도 NSL에 대한 요구는 점점 증가했다. NSL은 실제로 보다 더 많은 검사를 시행하게 되었다. 리벳은 NSL에 대해 ‘전망 좋았던 사업이 골칫거리’로 전락했다며 언짢아했지만, NSL은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정규 측정 테스트 센터가 되달라는 공식 요청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NSL의 측정 부서는 곧 생산에도 관여하기 시작해서, 영국과 미국이 더 이상 공급하지 못하는 블록 게이지(slip gauge)를 만들었다. 블록 게이지는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게이지로서 고정밀 작업과 다른 게이지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NSL 물리학 부서에서는, 반사하는 성질을 가진 모든 광학 유리나 강철의 표면 경화, 보강, 강화와 같은 고온공업 과정에 사용되는 모든 공업용 고온계 측정을 포함한 중요한 전시 업무를 담당했다. 마찬가지로 전자기술 부서에서도 전자 장비 검사, 기뢰 폭발을 피하는 소자(消磁)선(degaussing ships), 습한 회귀선 지역에서 사용 가능한 신호·무선 장비 개발 등의 요청으로 업무 전향이 일어났다.

 

전쟁은 NSL의 역할을 급격하게 바꿔놓았다. 국가 정밀측정 시스템의 정점에 있어야 할 연구소가 호주 주 정부들의 무책임함으로 갑자기 공황상태를 겪었다. CSIR 또한 NSL이 전반적 테스트 업무를 수행할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 결과 전쟁 중에 시도했던 산업 발전을 위한 테스트 자원을 조정하려는 노력은 무산됐다. 잠시나마 NSL이 국가 승인 및 검사 계획의 정상에 자리 잡기도 했었으나, 소규모 파트너로 책임이 축소됐다가 결국 참여자 정도의 역할로 남았다. 그러나 평화가 도래하리라는 전망은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무위로 만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