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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 인사이드/멤버 인터뷰

길이측정분야 ‘마당발’…대통령표창 받다



"대통령표창은 개인 유공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그 어떤 상보다도 의미가 큽니다." 


김명희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학장이 지난달 26일 국가기술표준원에서 열린 계량측정 유공자 시상식 단상에 올랐다. 대학의 수장이 아닌 계량측정분야의 전문가로 최고의 영예라 불리는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지난 2001년 서울국제기능올림픽 국제 심사위원 자격으로 대통령표창보다 높은 산업포장을 수상했지만 김 학장에게는 이번 표창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힘겹지만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인생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2015 계량측정의 날'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시상식은 계량측정의 중요성을 되새기고자 계량측정 산업진흥 및 국가 기술경쟁력 향상에 기여한 이들에게 포상이 이뤄졌다. 김 학장은 계량측정을 비롯해 산업체 품질관리분야 인력양성, 기능올림픽 진흥기여 등을 공로로 인정받았다.  




길이측정분야에서 그는 마당발로 통한다. 다방면으로 오랜 기간 활동하면서도 열정이 남달라 그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길이측정과 관련해 산학연이 함께 하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측정클럽 길이분과 부회장만 10년을 했다. 클럽의 태동을 지켜 본 산증인이다. 지난해 부회장직을 내놓으며 운영위원으로만 활동하고 있지만 회원들과의 지속된 만남에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 학장은 “측정클럽은 초창기부터 활동을 해 애정이 남다르다. 연구원과 기업체, 대학 등 각계 전문가들이 정보를 공유하기에 어려움이 와도 해결점을 바로 찾을 수 있어 좋다”며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주안점을 뒀던 것은 회원들 간의 소통이었으며 측정클럽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앞으로도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정기구(KOLAS) 교정분야 인정위원회 인정위원과 KOLAS 길이분야 기술위원 및 숙련도 기술위원으로도 8년 넘게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KOLAS 선임평가사로 매년 10~15회 정도 평가에 참여하고 있다. 


국제기능올림픽과는 4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올림픽 출전 선수지도는 물론 국제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국무총리표창과 산업포장을 받았다. 국가교정기관과 산업체 근로자들을 위해서도 다양한 교재집필과 학습 프로그램 등을 개발해 산업체 품질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능력이 발휘 된 곳은 대학이었다. 그는 한국폴리텍대학에서 43년간 근무하며 1000여명에 가까운 정밀측정분야의 여성 우수 기술 인력을 배출해 냈다. 1990년 직접 신설한 나노측정과는 폴리텍대학 전체 학과들 중에서도 우수 학과로 불러지고 있으며 매년 졸업생 90% 이상이 국가교정기관과 품질관리분야에 취업해 활동하고 있다.  


김 학장은 "나노측정과를 만들 당시에는 나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할 때였다. 나노측정과 졸업생이 갈 수 있는 분야는 기업체의 품질관리분야에 해당했다"며 "여성의 섬세함이 품질관리에 적합함을 기업체에 지속적으로 알렸는데 학과특성과 기업체의 수요가 잘 맞으면서 아직까지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으로 나노측정과는 대학의 간판 학과가 됐다. 첫 졸업생 연봉이 600만원 정도였지만 지금은 2000만원을 넘는 수준에 이른다. 기업체가 학과에 제공하는 장학금도 매년 2000만원을 넘는다.  


김 학장은 "전국의 34개 폴리텍대학 캠퍼스에 260여개의 학과가 있다. 매년 평가를 하는데 나노측정과는 10년 동안 10위권 안에 있다"며 "학생 선발부터 양성률, 국가기술자격취득률, 취업률 등에서 매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고 졸업생에서 대학 수장으로…"멈추지 않고 달려온 집념의 인생"


올해 3월 김 학장은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의 제8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공고 졸업생으로 박사 학위도 없지만 그는 대학의 운영 책임자가 됐다. 실패 없이 상승곡선의 인생을 이어온 데는 가족의 힘이 컸다고 그는 자부한다.  


그는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공부는 사치와 같았다. 보리밥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는데 그 아이들보다는 잘 돼야겠다는 생각에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가족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장학금으로 학업을 이어가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이 아닌 산업체를 택해 돈을 벌었다. 그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모교에서서는 그를 조교로 불러줘 2년여 만에 실기교사가 될 수 있었고 이후 이것이 직업훈련교사가 되는 초석이 되었다. 


"금성전선에 입사를 했는데 하루 일당이 당시 240원. 한 달을 죽어라 일해도 만원을 벌수가 없었다. 스승의 도움으로 조교가 돼 다시 학교로 돌아갔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공부를 다시 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후 야간대학을 다니며 일을 병행한 그는 국립서울산업대학 기계설계과를 졸업하고 단국대 공업교육 석사도 마쳤다. 기계가공 기능장, 기계제작 기술사, 기술지도사 등 관련 분야의 자격도 모두 갖췄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놓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 됐다. 


그의 노력은 그간의 수상 경력이 고스란히 말해준다. 국무총리 표창부터 노동부장관 표창, 산업포장, 경기도중소기업청장 표창, 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 공로표창, 지식경제부장관표창 등 측정분야에서 받을 수 있는 웬만한 상은 거의 다 휩쓸었다. 


시간 단위로 일정을 작성하는 김 학장. 7년 정도 된 그의 차는 25만km를 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더 바쁘게 살아갈 거라고 힘주어 말한다. 


"나라별로 길이의 표준이 다르면 국가 간의 상거래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만큼 표준의 유지는 중요합니다. 국제 표준에 국가 표준을 맞추고, 국가 표준에 기업이 표준을 맞춥니다. 이것을 소급성이라고 하는데, 특히 길이의 표준은 다른 표준의 기본이 됩니다. 평생 해 온 일이지만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습니다.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으니 더욱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요."